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시 모음

칠선암(七仙庵) #2

by RobotWizard 2022. 1. 4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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칠선암 #2

 서재남

뭐 볼 것 있다고
누가 이런 오지를 품 내서 찾아 오겄는가
하도 지대가 높고 길이 험해서
등산 철이라 해봐야 한 달 내
사람 서너 너댓이나 올라 올랑가
歲寒에는 눈 한 번 왔다 하면 석 달은 딸싹없이
눈 속에 갇혀 버리고 마네, 이곳이
어떤 때는 아침에 일어나 보면은 마당에 눈이
한 길은 남아 되게 쌓였을 적도 있어
천지가 온통 눈밭이야. 그런 날은 사람커녕
까막까치 참새새끼 한 마리
종일 얼씬을 못해

자네 기왕지사 올라 왔으니
한 삼년, ‘나 죽었네’하고
저 아래 일은 생각도 말고 지내소
사람 미련헌 것들이
제 아무리 목숨 내걸어 부르대든들
세상 이겨먹을 가망이 없는 바에야
머추름 물러 날 줄도 알어야지
괜히 가슴팍 골병에다
술病으로 五臟 다 무너져서는
제 命 못 지키고 지로 가는 수가 허다 허지

사아람!
이 늙은이 말 어찌 들을란지 몰라도
이제는 자네도 속 좀 들어야지 않겄는가
예 와서도 여적지 그 것들을
신주단지처럼 붙들고 앉었구먼
그 놈의 짐 많어서 어디 갈 길은 가겄는가?
세상 百千萬事 다 허상 아닌 게 어딨어
깔려 죽지 말고 어서 버려버리소
그런 연후에
‘인자, 나는 없소’하고 살어
융기(隆起)할라는 울컥증 꾸욱 누르고
목구멍에서 단내가 나고 쓴 물이 올라와도
당췌 입안엣 것 뱉어내지 말게
어째? 그럴 맘이라도 먹어 볼 텐가 어쩐가?
이 적막강산
市井 개소리 잡소리 들리지 않어 세상 좋은 곳
욕심만 안부리면 여그도 사람 사는 데여
며칠만 지내다 보면 곧 괜찮아 질 것이네

자네 보아 허니
보리 잡곡밥 고봉에다
실가리 된장국 한 사발은 너끈히 비울만치
식성 아직 성하겄다
억새이엉 칡넌출로 지붕 실하게 덮어 놨으니
몇 년은 눈 비 바람 걱정 안 해도 되겄고
땔나무 장작 내 저리 많이 장만을 해 놨겄다
올 겨울 눈 내리는 밤
군불 지피고 아랫목에 누웠어 봐
그러고 누워서 뒤안 나뭇가지 위에
눈 내려앉는 소리를 들어 봐
자네 다친 가슴패기
금새는 새 살이 찰 것이네
그 놈의 마음살림 힘 좀 타기 전에는
갈 생각일랑은
아예 마시게


2001. 11.24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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