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시 모음

이 땅에 똥개로 태어나

by RobotWizard 2022. 1. 4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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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 땅에 똥개로 태어나

 

서재남

앞집 사는 프랑스産 하얀 털북숭이 브리짓드는
제 쥔 품에 안겨 오늘 아침 동해안으로
삼박사일 피서여행을 떠났다네
망할 것, 룰루랄라 휘파람 불며 거만을 떨대

자탄하지 말게
우리 같은 똥개가 어디 개 축에나 든다고
갖은 멸시 천대에 뻑하면 화풀이 발길질에
옆구리 갈비뼈 성할 날 없는 처지로
언감생심, 개다운 대접이라니?
똥개 주제에 바랄 걸 바라야지

"나는 너희의 하늘이니 우러러 경배하라
내 말은 곧 하늘의 법, 오로지 순종할지니
토를 달거나 거역하는 자 목숨 온전치 못하리라."는
귀에 딱지가 눌도록 들어 외운
주인 어르신의 지엄하신 분부 받들어
시키면 시키는 대로
집 지키라면 집 지키고
뭐 물어오라면 물어다 바치고
이제는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착착
하지 말란 짓은 절대로 하지 않고
우리 똥개들
고분고분 말 잘 듣기로 유명들 하잖나?

그렇게 주인을 하늘처럼 떠받들고
충성을 다 바치면 뭐 해
저 뒷집 흉악무도한 아메리카산 도사견
시도 때도 없이 달려들어 물어뜯고
칼로 찌르고 장갑차로 깔아버려도
개 값 물어내란 말 한마디 할 줄을 아나
역성들어 보호는 못해 줄 섟에
앞으로는 그 개 앞에서 함부로 짖지도 말고
그 근처에 얼씬도 말라니
이게 무슨 주인이냐고

제 집 개 목숨을
오뉴월 깔따구 목숨만도 못하게 아는
왜 하필 이런 놈의 집구석에서 태어나서는
개 취급도 제대로 못 받고 사는지
우리 다음 생에 다시 난다면
이 집구석에 개로는 당췌 태어나지 말 일이네


2002.7.12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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