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長詩 / 우리 집은 개판이다

RobotWizard 2022. 1. 4. 20:24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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우리 집은 개판이다

 

 서재남

이런 말 하긴 좀 뭣하지만
솔직히 우리 집은 한마디로 개판이다
세상에 개판 개판 해도 이런 놈의 개판은 없을 게다
다른 말이 아니라 이 놈의 집구석에선 사람이 아닌
개새끼가 버젓이 주인노릇을 하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

본래 우리 집은 조상 대대로 개를 많게는 늘상
한 여남은 마리씩은 남아 멕였었다
키워서, 새끼 내서 더러 장에 내다 팔기도 했지만
개 키워 무슨 이재를 하자는 목적이 아니라
집이 워낙 동네서 뚝 떨어져 외지기도 하거니와
좀 안다는 사람들마다 일쑤
이 집의 터가 세단 말들을 하고 그래서
개한테 집도 지키게 하고
방액도 하자는 뜻에서 길렀던 것이다
물론 개뿐 아니라 갖은 가축들도 곁들여서

우리가 치는 개는 본래 순 우리토종 똥개다
전에 동네에 개박사라는 별호를 가지신 양반이
한 분 계셨는데 개고기라 하면 환장을 하는 양반이셨다
그 양반,
길에 나돌아다니는 개새끼만 봤다 하면
입안에 금새는 군침이 도는지 입맛 짝짝 다셔 싸면서
몇 십년 헤어졌던 님이나 만난 듯 눈빛 반짝반짝
그리나 반가워하곤 하시는데
해년마다 여름 복날이면 꼭 동네 청년들 대여섯 앞세우고
우리 집에 찾아왔다
그러면 추렴하라고 암말 않고 개 한 마리 내어 주면
“개 중에도 시골서 놔멕인 누렁개가 단연 으뜸이지
사람 똥이며 시궁창 밥풀떼기며
들에 뱀이며 쥐새끼며 할 것 없이
온갖 것 다 줏어 처먹고 큰 똥개가 맛이 최고지“
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지면서
괜시리 허나마나 한 소리나 몇 마디 흘리고는
패거리들 몰고 개 끌고 저 서당골로 직행하곤 했다
그 양반 말짝시나
똥개 키우는데 따로 드는 게 뭐 있나
그저 식구들 먹고 남은 음식 찌그럭지나 좀 주면 되었지
별 신경 안 써도 잘만 커 주니 고맙고

그러던 어느 날 느닷없이 코만 뾰족한 것이
그야말로 이상스럽게 생겨먹은 서양 잡종 개새끼 한 마리가
머리털 더풀더풀해 가지고 어기적거리며 기어들어 오길래
이게 장차 큰 화근이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는
좀 키워서 장에다 내다 팔면 쓰겄다 싶어서
거둬 멕이기 시작한 것인데
아, 근데 이 놈의 개새끼는 어찌 되어먹은 놈의 개새끼가
어느 왕실에서나 크다 왔는지 어쩐지 입은 가저 가지고
우리 집엣 개들 모냥 이것저것 아무것이나
아구아구 먹는 것이 아니라 이런 세상에,
사람도 못 먹는 고깃국이나 밝히고 그러니
이, 사람 미칠 일이 아닌가
이 놈의 개새끼 한 마리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
우리 똥개 열 마리의 몫어치보다 훨씬 많더란 이 말이다

아무튼지 이 놈이 들어온 날부터 조용하기만 하던 집이
하루라도 바람 잘 날이 없이 되어 버렸다
내가 이 녀석 때문에 이때까지 속 썩은 일을 생각하면
당장에 잡아 버리든지 장에 갖다 팔아버리든지
해도 시원찮을 일이지만 마음이 모질지 못해 그리 못했다
헌데, 그 알다가도 모를 일은 우리 식구들이
이제는 다들 이 개새끼의 존재에 대해서
무덤덤해져서 그러는지 어쩌는지
이 개하고 같이 식사하고 같은 침대 쓰고 살아도
별반 싫은 정들을 안 내고 있다는 것이다
저렇게 안방 아랫목 차지하고 배 처억 깔고 엎으러져 있어도
당연한 것처럼
“저리가, 이놈의 개새끼!” 하고
발길질 해 내치는 사람이 하나 없으니.......
아예 식구같이, 아니 식구 아니라 상전 모시듯
오냐오냐 대접을 해 주고 있는 데에야
정말이지 기가 찰 노릇 아닌가
오래도록 같이 살다 보니 정이 들어서 그럴까?
허허 이런 젠장을 헐,
그 놈의 정!

이 건 들어올 때부터서 제 놈이 무슨 점령군이라도 된 것 모냥
모가지 빳빳이 쳐들고 건방지기가 한량이 없었다
예의범절은 고사하고 도무지 아래 윗턱도 모르는 놈이
그래도 처음엔 이 것이 어려운 손처럼
행동거지를 제법 조신하게 하는 것 같더니
웬걸 역시 개새끼는 개새끼지 뭐 별 수 있어?
그런 것이야 배운 데 없는 개새끼니 그러려니
용서를 할 수도 있지만 간혹 되지도 않는 억지를 부려 쌓거나
어깃장을 놓을 때는 참 얼척도 없지
이런 걸 비싼 돈 쳐들여 가며 건사를 헌 내가 속이 없었다
어느 때는 식구들을 쭈우욱 앉혀놓고 어깨 토닥토닥해가며
일장훈계를 해댈 때는 사람 미치고
환장을 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
이 게 이 모양으로 주객이 완전히 바뀌어 버린 것이다

이 것이 날 궂은 날 진창길 쏘댕기다가
흙 묻은 발로 들어 와 마루며 광이며
온 집구석 들쑤시고 다니는 건 예사고
함부로 물어뜯고 내다버리고 해서 살림세간 하나가 성한 것이 없다
심심하면 엎어져 잠이나 잘 일이지 왜 할 일 없이 마루 밑의 신발들은
밭에 물어다가 구뎅이 파고 묻어를 놓는지
그러니 하다 못해 신발 하나라도 짝 맞는 게 없다
더 말해 뭣하겠는가
이 것이 지키라는 도둑은 안 지키고 틈만 나면 낮이고 밤이고 편갈라서
개싸움이나 벌리니 동네가 온통 개소리로 진동을 한다
또 이 놈의 개새끼는 사람들 잠자려고 누워있으면
뭣 할라고 뒷산 꼭대기까지 기어올라가서
미쳤다고 달을 보고 짖는 것일까
그래 밤마다 사람들 깊은 잠 못 자게 허고
한 마디로 미친놈의 개새끼지
요즘엔 이것이 광견병 예방 접종을 안 해서 그런가
어디서 쥐약 훔쳐먹고 물을 안 먹어서 그런가
저 옆의 옆 동네까지 돌아다니면서 죄 없는 남의 닭이나 물어 죽이고
남의 집 애기 오줌 싸는 놈 고추는 물고늘어질 건 뭔가
그래 시방 그 집 귀한 아들 고추 값 안 물어주게 생겼는가 말이다
사람 가리잖고 아무나 대고 물어뜯고 저 지랄병이니
이빨을 몽창 다 뽑아버리든지 하기 전에는
저 놈의 버릇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

하도 동네에 말이 많아 무슨 수를 써도 써야지
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 달포 전에는 이 놈을
조용히 불러 앉혀 놓고 자분자분 내가 타일렀다
“ 아가 이 못된 놈의 개새끼야,
아무리 사람 은혜를 모르는 놈이래도 네가 이래야 쓰겄냐
느그덜 잡종 개들 사는 동네로 보내 줄 테니 인자는 가그라
이 핑계 저 핑계 대지 말고 똑 부러지게 얘기해라
그 동안 동네 여론이 어떻든 간에
듣는 둥 마는 둥 너 시들방귀도 안 뀌더니
어쩔려고 저 번 참에는 말 듣는 시늉이라도 했다믄서
‘ 한 살림 차려서 나갈테니
지금 이 집보다 더 큰집을 달라‘ 고 그랬다대?
그래 그럼 좋다 우리 사람들 말 중에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다
사람도 제 좋아하는 사람끼리 비슷한 사람끼리 모여
친하게 지낸다는 말이다
지금 터를 물색중이니 조금만 기다려라
저 서양으로 멀리 갈 것도 없이
요 옆에 일본만 가도 마땅한 터 구허긴 식은 죽 먹길 것이다
너 거그 가면 환대받고 네 살기에 여간 합당헐 것이다
아무 걱정 말어라
내 얘기 잘해서 그 사람들보고 소유권 이전등기라도 해주라고 허마.“
이랬다
그 사람들 서양 개새끼라면 좋아 환장들을 한다니 어서
하루라도 빨리 이놈을 그리로 쫓아 보내야겠다

근데 사실인지 어쩐진 몰라도 저기 서양에서는
이런 개새끼들이 진짜 개 행세를 한다던데
비단 보료 위에서 귀족처럼 떠받들리며
왼갖 호사 다 누림서 산다더라고?
버르짓도 바르든가 브리짓드 바르뭣인가
그 여자 말마따나 그쪽 사람들은 죽은 개고기를 먹긴 커녕
개새끼를 제 조상보다 더 위한대
믿어지진 않지만 들리는 말로는 기르던 개새끼가 죽으면
성대하게 장례식까지 치러 준다고도 하고
에이그 그러니 개새끼가 사람 위에서
상전 노릇을 할 밖에 없지
그 놈의 동네는 얼마나 더 개판일까
아이고, 걱정스럽네
전혀 남의 일 같지가 않다


2002.3.4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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